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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이야기

맨부커상 채식주의자 읽어보셨나요?

by 관리자 2016.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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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3사 뉴스에 나왔던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작 읽어보셨나요?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를 강추합니다.

상처 입은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인 상상력에 결합시킨 아주 독특한 작품입니다. 


채식주의자 베스트 서평입니다.

저보다 잘 내용을 정리 하셔서 한번 읽어보세요~~!





<채식주의자>를 읽고나서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맛있는 고기를 먹겠다는 것은 해외여행과 아파트 장만 등과 함께, 현대인의 가장 큰 욕망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 욕망의 힘으로 세상은 역동성을 얻었고, 발전해 가고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은 지치면 지는 사회가 아니던가. 미칠때까지 흔들고 마시고 일해야 하는 곳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육식을 거부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육식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우리는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많이 기르는데, 닭이나 돼지, 소는 쉴새없이 잡아먹는다. 개의 지위가 높아진 것도 얼마되지 않았다. 꿈속에서 피와 고기들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잔인함을 깨달은 여자는 육식을 혐오하게 되었다.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경계가 있는 것이었다. 닭을 개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치킨이라는 음식이 잔인하게 다가와 소름이 끼칠 것이다. 그걸 경험한 소수의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언제나 다수의 방식만을 유일한 해결책 혹은 진리로 본다.    

 

소름끼치는 잔인함을 깨달은 사람은 점점 육식을 거부하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은 소수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베트남전 출신인 아내의 아버지는 폭력을 써서 육식을 강요하고, 아내는 손목을 긋게 된다. 타인의 의지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려하는 것 또한 욕망이자 폭력이었다. 피흘리는 영혜를 엎고 병원으로 달려간 것은 형부였다. 두번째 소설인, <몽고반점>은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몇 년전, 그를 사로잡았던 이미지는 처제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되살아 난다. 몽고반점을 중심으로 식물의 화려한 이미지에 사로잡힌 그는 처제에게 찾아가 작업을 부탁한다. 정신병원에 갔다 온 처제는 이혼중이었다. 그는 예술가의 작업욕망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몽고반점이 있는 무의식적으로 개방적인 처제에게 성적으로 끌리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수컷의 정복욕일 뿐일까. 욕망하는 자는 우월한 포식자 같았다. 그럼 욕망을 버린 처제는 포식 동물에서 초식 동물로, 동물에서 식물로 점점 강등되어 가는 것일까. 우리는 그녀의 강등을 막아야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놔둬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식물도 욕망이 있었다. 활짝 꽃 피고픈 욕망. 처제는 상대방 남자 몸에 그려진 아름다운 꽃을 어루만지면서 젖고 말았다. 그녀의 욕망은 꽃이 피어나듯이 태양을 향해 열리는 식물적인 욕망이었다. 처제를 향한 욕망을 더이상 억제하지 못한 그는 옛 여자친구를 찾아가 몸에 꽃을 그리고 처재와 사랑을 나눈다. 몽고반점으로부터 피어난 한송이의 꽃처럼 그녀는 형부의 폭력적인 욕망을 식물적인 형태로 받아낸다. 그녀가 꿈에서 본 얼굴은 뱃속에서 올라온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몸은 식물의 이성이 지배하고 있었다. 동물인 인간이지만, 식물의 특성이 강하게 발현된 것이었다. 그건 진화의 긴 시간을 거스른 식물성의 반란이었을까. 언니 인혜는 동생집을 찾았다가 둘의 교접 영상을 보고 신고한다. 그녀는 두 사람의 행위를 예술로 볼 수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들의 짓으로 치료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그의 행위는 예술이라는 핑계로 처제를 겁탈한 비열한 욕망일 뿐이었을까.

 

욕망은 형부를 겉잡을 수 없는 파멸로 이끌기도 하였다. 하지만, 욕망이 없었다면 예술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가정도 합쳐지지 않으며, 자식을 낳고 돈을 벌기 위해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식물처럼 인간은 광합성으로 밥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움직여서 밥을 쟁취하고 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더 좋고 많은 밥을 뺏기위해서 경쟁하고 서로 속이기도 한다. 인간에게 밥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사명이자 당연한 욕망이었다. 세 번째, <나무불꽃>에서는 언니 인혜의 힘든 삶을 보여준다. 남편과 헤어졌고, 동생은 다시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녀는 돈을 벌어서 아들을 키워야 했고, 영혜의 보호자 노릇을 해야만 했다. 여자 혼자서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한때 아들을 버리려고도 하였다. 아들은 엄마가 새가 되어 떠나려 했음을 꿈에서 보았다고 말해준다. 영혜는 병원에서 물구나무 서있었다. 원래 나무의 모습이 그러했다고 한다. 손이 뿌리가 되어 가랑이에서 꽃이 활짝 피는 게 나무였던 것이다. 그녀는 점점 동물이 아닌 식물의 본성을 찾아간다. 식물성에 가까워질수록 육식을 비롯한 먹는 행위들에 대한 완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먹지 않으니 살은 계속 빠지고 죽을 위험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죽을 수도 있기에 병원에서는 마취까지 해가면서 음식을 먹게 하고 있었다. 널 살리기 위해서야. 라는 언니의 말에 영혜는 왜, 죽으면 안되냐고 되묻는다. 살기위해 짐승적인 욕망으로 살아가는 동물의 삶에 문제제기를 하였다. 그녀는 안 먹어도 될정도로 이미 식물적인 특성을 얻었기에 육체가 죽는다면 자신은 식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인혜는 하혈하는 병을 얻었었다. 큰 병이 아님을 알았을 때, 왠지 모를 고통을 느꼈다. 살 수 있는데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고통속에서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병을 얻어가면서까지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사회가 만든 프로그램 때문일까? 동물적 삶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번잡한 요소들. 자신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것들 속에 우리는 싸여있고 그 속에서 남들과 비교해가면서 하루하루의 욕망들을 소진해가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삶을 벗어나려하는 영혜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를 살리기위한 병원의 의료행위였다. 영혜를 살리기 위한 행위는 근본적으로 선한 일일텐데, 소설속에서는 폭력적으로 비춰진다. 그것이 식물성에 진입한 영혜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나무 불꽃은 식물성인 나무들의 분노였는데, 인간은 모두 동물이라는 대명제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녀가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몽고반점이 꿈속에서 그녀의 의식을 움직였기 때문일까. 의식이 바뀌면서 사람은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새로운 삶을 바라게 되었다. 선택의 키는 그녀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 한 방향으로만 보고 있었다. 그것은 욕망의 발현이 빛이며 정의, 희망이라는 보편적인 인식 때문일 것이다.




한강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합니다.

뛰어난 상상력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 지식의 개념을 가지고 사람들의 생활과 접목시켜 교훈을 이야기합니다.


한강 채식주의자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베스트셀러의 수준이 아닙니다.


맨부커상 수상작입니다.

명예로운 상을 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고 머리한번 깨워봅시다.

구매하실분들을 위해서 링크 걸어둘게요~!


고등학생여러분들은 필독하셔야합니다.

수능에 출제 될지 모릅니다. ㅎㅎ





친절한 나그네가 링크 똑디하게 걸어둡니다.

반드시 사서 읽어보세요~~!! 소장가치100% 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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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무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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